주디 갈란드(Judy Garland), 무지개를 넘어 희망을 노래한 그녀

할리우드가 사랑한

그러나 할리우드가 죽음에 이르게 한 여인

‘주디 갈란드’


1. 주디 갈란드에 대하여

주디 갈란드는 인기 아역 스타로 시작하여, 영화 <오즈의 마법사>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된 미국의 배우 겸 뮤지컬 배우입니다. 대중들에게는 1939년에 제작된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평론가들은 대체로 1954년 <스타 탄생>을 주디 갈란드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하기도 합니다.



그녀가 활동할 당시는 할리우드 황금기로 외모적인 부분이 인기를 얻는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그녀는 얼굴이 예쁘거나 섹시한 매력은 없지만 굉장히 훌륭한 가창력과 독특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라는 평을 들었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최저음의 음역 ‘콘트랄토’ 라고 합니다).


영화 부문에서 ‘쥬버나일 아카데미 상’, ‘골든 글러브 상’ 그리고 ‘세실 B. 드마일 상(Cecil B. DeMille Award)’을, 음악에서는 ‘그래미 상’과 ‘스페셜 토니 상’도 수상했으며, 당대의 유명 뮤지컬 스타들도 갈란드는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뮤지컬 스타라 했다고 합니다.



이름 : 주디 갈란드 (Judy Garland)

- 그녀의 이름은 30년대 유명한 노래 "judy"와 유명한 영화 평론가 Robert Garland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본명 : 프랜시스 에셀 검 (Frances Ethel Gumm)


국적 : 미국


출생 : 1922년 6월 10일, 미네소타 주 그랜드래피즈


사망 : 1969년 6월 22일 (향년 47세), 잉글랜드 첼시

-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사망


직업 : 배우, 가수, 뮤지컬 배우


활동 : 전성기(1940년대~1950년대)

        - 1924년 – 1969년 (가수)

        - 1929년 – 1967년 (배우)


신체 : 151cm , AB형


2. 그녀의 생애

주디 갈란드는 미국의 미네소타 주 그랜드래피즈에서 태어났습니다. 2살때 소규모 무대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 것을 시작으로, 3세 때부터 그녀는 두명의 친언니들과 함께 '검 시스터즈(The Gumm Sisters)'로 데뷔하였습니다. 그녀의 생은 어릴적부터 순탄치 않았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열성과 강요 그리고 아버지의 동성애 때문이었습니다. 한 도시에서는 아버지의 남성과의 성행위로 인해 추방당하기도 하였고 점점 가세가 기울어 자동차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 후, 1935년 9월 MGM이라는 회사(Louis B. Mayer)와 계약하게되면서 전속 연예인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동성애자였지만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수막염으로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3살이라는 나이는 아역을 하기에도, 성인 역할을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 그리고 당시 영화들의 주연배우들은 하나같이 섹시한 팜므파탈 또는 핀업 걸 스타일이었기에 키도 작고 상대적으로 못생겼다는 외모평가를 받았기에(스튜디오에서 별명이 ‘못생긴 아기오리’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할 수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MGM 스튜디오의 파티에 여러번 불려 다니며 노래를 하고 작은 역할을 맡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때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서 프로듀서들과 감독들에게 성접대를 여러 번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앤디 하디 시리즈>로 뜨기 시작했으며,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해준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녀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주디 갈란드의 어머니 ‘에셀’은 배우였으나 스다기 빛을 못보고 바닥을 전전하는 신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에게 투영하였고 식욕과 수면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마저 그녀의 아래에 철저히 ‘통제’하였습니다. 갈란드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 마음으로 여러모로 굉장히 노력을 했지만 매우 삐뚤어진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젊은 시절 주디의 어머니 에셀


그녀의 어머니는 무리한 스케줄을 소속사와 협조하며 딸에게 각성제인 암페타민과 수면제를 먹게 했습니다. 이 일이 훗날 그녀가 약물중독에 빠지게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디 갈란드는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에게도 푸대접을 받은 것은 기본이었으며, 갖은 폭언과 촬영 중 NG를 내면 뺨을 때리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또한, 체중 조절을 명목으로 어린 그녀에게 하루에 한끼의 식사를 주었으며 그마저도 수프와 커피만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80개비의 담배를 흡연하라고 강요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져다 준 <오즈의 마법사>는 대성공을 거두고, MGM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뮤지컬 드라마의 주연을 꿰차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무대 센스와 가창력, 그리고 그걸 받쳐주는 연기력으로 그녀는 성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약물 남용과 낮은 자존감이 항상 그녀를 지배했는데 집안의 막내에 ‘검 시스터즈’의 귀염둥이로 지내다가 영화사에 들어 가면서 또래의 배우들과 비교당하게 되며 외모적으로는 조금은 평범했던 그녀는 항상 비교와 무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3. 그녀의 불완전한 사랑

1) 데이빗 로스 (1941 ~ 1943)

그녀가 성인이 되고나서도 약물 남용은 계속되었고 1941년 3월 밴드 리더인 데이빗 로스와 약혼을 했는데 데이빗 로스가 아내와 이혼한지 겨우 두달 뒤였습니다. 1942년 11월 주디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MGM과 남편 데이비드가 주디의 착한 소녀 이미지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낙태를 종용하였고 주디는 결국 낙태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평생동안 당시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둘은 1943년 1월 이혼하게 됩니다.


주디 갈란드와 데이빗 로스



2) 빈센트 미넬리 (1945 ~ 1951)


주디 갈란드와 빈센트 미넬리


그녀가 출연한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라는 작품의 감독인 빈센트 미넬리와 결혼하게 됩니다. 빈센트 미넬리와 결혼한 이후에도 갈란드는 약물과 알콜중독으로 인한 잦은 입원과 자살 소동들로 인해 소속사와도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사이도 결국 멀어지게 되고 갈란드의 어머니는 1953년 60세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1951년 남편이였던 빈센트 미넬리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의 주디 갈란드


그녀의 망가져만 가는 삶과는 반대로 그녀의 인생 최고 연기력을 보여준 영화라고 불리우는 <스타의 탄생> 리메이크로 다시 한 번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게 됩니다.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자로 점쳐졌지만 아쉽게도 그레이스 켈리에게 돌아갑니다. 아직도 가장 공평하지 않은 수상 중 하나로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아카데미상의 흑역사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3) 시드니 루프트 (1952 ~ 1965), 마크 헤론 (1965 ~ 1967)

시드니 루프트와 세번째 결혼을 하여 딸을 낳고 아들도 낳았지만 남편의 도박으로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혼을 하게 됩니다. 마크 헤론과 네번째 결혼을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의 딸의 남편(사위)이였던 가수 피터 알렌과 불륜으로 마크 헤론과 이혼하게 됩니다. 


주디 갈란드와 시드니 루프트


그녀는 간간히 출연해오던 텔레비젼 출연으로 커리어를 완전히 선회했고 게스트트로 출연한 쇼는 높은 시청률을 찍고, 뮤지컬 쇼들로 높은 인기를 이어갑니다. 세계 각지에서 콘서트를 열고, 그녀의 콘서트는 항상 완매가 되었지만 이 와중에도 약물 남용과 알콜 중독은 더 심해지게 됩니다. 4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자신의 아이들마저 무대에 같이 세우며 겨우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공연생활을 시작합니다.


주디 갈란드와 마크 헤론


4) 미키 딘스 (1969)

그녀의 전담 매니저인 로잘린과 그녀의 남편 미키 딘스의 노력, 자신을 오랫동안 응원해온 동성애자 커플팬의 관심으로 어느정도 호전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969년 미키 딘과 다섯번째 결혼식을 올리지만 식을 올리고 겨우 몇 주 후에 약물 과다로 라이자 미넬리, 로나 루프트 그리고 조이 루프트 세 아이를 남겨둔 채 사망합니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47세였습니다.


주디 갈란드와 미키 딘스


사후 1997년, 주디 갈란드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그녀의 노래는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 미국 영화협회는 가장 위대한 10대 여성 스타로 그녀를 지정했습니다.


4. 동성애자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 그녀

주디 갈란드는 생전에 동성애자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활동했던 1940~1950년대 미국에서는 뮤지컬은 동성애자 및 유대인들의 문화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바로서의 이미지와 박복한 인생 역정 등이 동성애자들로부터 더욱 사랑을 받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