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에 대하여

장영실,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

최근 '천문'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장영실에 대해서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온 위인이지만 정작 장영실이 어떠한 업적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았었는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이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반성의 의미로 그의 업적과 그의 일생을 조사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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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민이었던 장영실

장영실(蔣英實)조선 전기인 세종 때 활약한 과학자이자 기술자입니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이며 본관은 아산현(오늘날의 충남 아산)이고 시조 장서의 9대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몰년도(출생과 사망)에 대해서 기록된바가 없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추측에 의하면 그는 약 60~70세의 나이(1385~ 1450)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출생 또한 명확하지는 않다보니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역사속의 실제기록에 따른 내용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쑤저우), 항주(항저우) 출신의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오늘날의 부산광역시)의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일천즉천 원칙에 따라서 장영실은 천민인 관기와 외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므로 천민의 신분으로 관노비가 되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대왕이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으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습니다. 미천한 노비의 신분에서 정3품관 상호군(上護軍)의 관직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장영실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2. 조선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세종 시절에 동래현이 가뭄으로 어려울 때 장영실이 수로를 파고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게 수차(오늘날의 양수 펌프)를 개발해내어 가뭄을 해결하여 세종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처음 장영실이 등장한 것은 연려실기술이며, 태종실록에서부터입니다.

 

장영실은 관노비였으나 태종이 그의 발명가로서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발탁하였으며,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 윤사웅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고 합니다. 장영실이 40대로 추정되는 시절(세종 5년인 1423)에 세종은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여 그를 면천하고 왕실의 물품을 제작 및 수리하는 상의원 별좌로 임명하였습니다. 대신들이 노비인 장영실을 등용하는 세종의 결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설은 실록의 기록을 비추어보아 사실이 아닙니다.

 

1424(세종 6) 세종은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이때 청동제 물시계인 경점지기라는 물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기기는 단점이 있었는데, 시각을 사람이 직접 읽어 알려줘야 했기에 밤에 졸다가 놓치게 되면 곤장을 맞기도 했습니다.

 

 

1432년에 공조판서 이천의 지휘 아래 천문 기구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했으며, 1433년에는 혼천의 제작에 착수해 단 1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이후 장영실은 세종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천평일구, 공공장소 설치용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 많은 과학적 발명품들을 쏟아냈습니다. 해시계의 경우에는 해가 비출 때 생기는 그림자로 시간을 재는 기구이기 때문에 저녁이 되거나 화창하지 못하면 작동할 수 없었기에 이를 보완하고 앞서 개발한 경점지기의 업그레이드판의 시계가 자격루(일명 보루각루)입니다. 이 자격루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 물시계입니다. 또한 자격루를 발전시켜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인 옥루(일명 흠경각루)를 개발하였으며, 이를 흠경각이라는 전각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후 태종 시대의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갑인자의 주조를 감독하였습니다.

 

그 뒤 경상도 찰방별감으로 제수되어 1441, 강수량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기구제작에 착수해 세계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 그리고 강의 범람여부를 알 수 있는 수표를 발명하였습니다. 이 공으로 그는 대호군으로 특진하였다고 합니다.

 

3. 장영실의 마지막

세종은 여러 가지 질환으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천에 자주 갔다고 합니다. 장영실이 약 53세 되던 해(1442, 세종24)에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을 가기 위하여 타고 갈 가마를 제작하였는데 불행히도 세종이 이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마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장영실은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형 80대를 구형받았으나 세종이 형벌을 2등을 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파직된 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장영실이 그 뒤로 어떻게 생을 보내었는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